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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섭이 긴 여자 (1970) 본문
속눈섭이 긴 여자 (1970)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2245
- 감독: 임권택
- 각본: 곽일로
- 촬영: 이문백
- 출연: 문희 (숙진), 최무룡 (동진), 이낙훈 (박형사), 윤양하 (남규), 남미리 (미아), 장혁 (용).
전체적인 이야기는 [레베카]를 연상시키고 "토요일 오후 3시 37분"이라는 자막과 함께 호텔 침대 위의 남녀를 보여주며 시작하는 오프닝은 영락없이 [사이코] 다. 남편이 자신을 생명보험에 가입시키고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은 [의혹]. 00:19:00쯤 임권택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여러가지로 히치콕 영화들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는데, 히치콕만큼 변태스럽지는 않고 더 가볍게 볼 수 있다.
어쨌든 상당히 재미있게 봤다. 다만 디테일이 좀 아쉬운 곳들이 있는데 좀 손 봐서 리메이크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한 가지 문제라면 요즘 배우들 중에 최무룡이 연기한 캐릭터를 할 만한 배우가 생각나질 않는다. 여기서 최무룡은 매력적이고 어딘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남자를 연기하는데 정말 기막히게 매혹적이다. [주차장] (1969)의 최무룡이 섹시했다면 이 영화의 최무룡은 매혹적이라는 말이 더 잘 맞는다. 특히 댄스홀에서 문희와 우연히 마주치고 미소 짓는 모습은 마술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00:16:50 부근). 우린 이 순간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사랑한다.
초반은 흥미진진하고 빠르게 진행되는데 우리가 최무룡 팬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숙진이 동진에게 순식간에 매혹되는 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동진이 양장점에서 일하는 숙진을 찾아와서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첫 만남의 긴장과 끌림도 좋았다. 동진과 숙진의 섹스 장면은 반 강제로 시작되는 것도 그렇고 그 자체는 좀 괴로웠는데 그 직전에 동진이 문을 닫고 나갈 것인지 뒤돌아설 것인지 조마조마한 긴장감은 좋았다.
반면에 숙진이 동진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대목의 묘사는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영시간이 90분인데 조금 더 길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결말이 다가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대사로 길게 설명하고 맥이 빠지는 게 큰 흠이다. "말많은 악당"이 한참 떠들다가 자기도 지쳤는지 동료에게 나머지 설명하라고 넘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저 시절 한국 영화 속 남자들 여자 뺨 때리는 저 악습은 대체. 악당이 때려도 괴로운데 저 시절 영화들은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때린다.
70년대 초 컬러 한국영화들에서 플래시 백을 흑백으로 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고 이 영화도 그런데, 문희와 최무룡의 투 샷 대화 장면들이 문희의 회상 속에서는 문희의 시점, 즉 최무룡의 단독 샷으로 나오는 게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