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달리는 거북이
낙동강 칠백리 (1963) 본문
낙동강 칠백리 (1963)
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918
- 감독: 이강천
- 각본: 곽일로
- 촬영: 이병삼
- 출연: 이예춘 (덕삼), 최무룡 (삼용/용호), 김지미 (채순), 김진규 (윤호), 최지희 (옥진), 최남현 (윤호 부), 김정옥 (윤호 모), 최성호 (김 비서) 외
[1]
최무룡 영화들을 보면서 트위터에 간단하게 감상을 남기곤 했지만 [낙동강 칠백리]는 숨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어서 좀 길게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봐도 언급이 너무 안 되는데, 그냥 묻히기에는 아까운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2015년에 필름이 발굴된 뒤 2017년에 시네마테크 KOFA에서 한 번 상영된 적이 있을 뿐이고 영상도서관 VOD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이 VOD를 본 최초의 관람객이라고 믿을만한 곡절이 좀 있었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KMDb에 올라와 있는 줄거리가 비교적 정확하고 daum에 올라와 있는 줄거리는 완전히 엉터리다.
이 몇 달 동안 60년대 우리나라 멜로 영화를 많이 보고 있지만 의외로 별로 울지 않고 있는데 주인공의 사연이 딱하긴 하지만 주인공의 결정과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 짜증이 날 정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극중 인물들이 먼저 울거나 관객을 울리겠다고 작정하고 들이대지 않음에도 주인공들에게 공감이 가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흘렸다. 가령
- 채순이 물에 빠뜨린 윤호의 카메라를 건져내는 삼용 (이건 정말 실제로 봐야 안다…)
- 채순이 가출한 다음에 술에 취해서 "삼용아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라고 잠꼬대하듯 말하는 덕삼
- 채순이 윤호와의 사이에 낳은 갓난아기를 업고 어쩔 수 없이 귀향한 밤에 채순을 위해 부산 나가서 살자고 덕삼에게 말하는 삼용과 옆방에서 듣고 있는 채순
어느 인물이 어느 순간에 어느 장소에 왜 있는지도 말이 되게 해놓았다는 점도 좋았다. 뻔하다면 뻔한 스토리지만 37분경까지는 진행이 스피디해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데 그 다음 채순의 상경 고난기가 좀 지나치게 길다. 옥진을 연기하는 최지희 배우의 활약 덕분에 이 갑갑한 구간을 견딜 수 있었다. 사실 삼용-채순-윤호의 삼각관계보다도 채순-옥진 간의 동지애와 덕삼-삼용 부자간의 정이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특히 덕삼-삼용의 관계가 좋았는데 삼용은 채순에게는 사랑하면서도 퉁명스럽게 굴지만 덕삼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다.
개봉 당시 잡지 기사 ([야담과 실화] 63년 10월호, http://blog.daum.net/lipstips/18117576)를 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채순이 삼용을 남자로 대한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실제 영화에서 초반에 채순과 삼용의 심리는 그보다는 좀 미묘하다고 생각한다. 남매처럼 자랐지만 두 사람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이고 그걸 피차 알고 있고 동네 사람들도 다들 당연히 둘이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둘은 이성으로서의 사랑과 남매로서의 우애가 아직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표현도 서툴렀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결국 이성간의 사랑으로 예쁘게 맺어졌겠지. 마을 남정네들은 아무도 감히 채순에게 수작부릴 생각도 못하는데 서울에서 온 윤호는 동네 분위기를 모르고 어려움 없이 성급하게 채순과 관계를 맺고 만다. 서울에서 온 남자라는 게 여러 가지로 작동한 셈인데 그 시절 시골 처녀의 서울에 대한 동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채순이 어린 시절 삼용에게 서울 얘기해달라고 조르는 장면이나 친구 옥순의 서울행을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밑밥은 충분히 깔아두었다고 본다.
최무룡 팬으로써 이 영화가 또 하나 매력적인 점은, 도시의 인텔리 역할을 주로 하던 그가 여기서는 순박한 시골 청년 역을 연기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최무룡 영화에서 최무룡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정신 좀 차리라고 외치고 싶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화의 삼용/용호는 많이 불쌍하고 가슴 아프다.
최무룡은 신체 노출을 별로 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꽤 노출이 있다. 딱히 베드 씬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뱃사공인데 항상 셔츠 단추가 풀려있고 물에 빠진 카메라 건지려고 강물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거의 다 벗는다. 뭐 이건 농담이고 진지하게 말해보자면 이 카메라 건지는 대목은 삼용-채순이 가장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고, 러브 씬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어지는 사건 전개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저 때 화면이 너무 어둡고 화질이 안 좋아서 최무룡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삼용이 채순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녀에게 헌신적인지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게 좋았다. 삼용은 채순을 너무 아끼고 소중히 여겨서 손목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 마지막에 채순 시신을 물에서 건질 때에야 처음 안아 본 것 같다.
그리고 이예춘 배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악역으로 명성을 떨친 분이지만 가끔 이런 선량한 역도 하셨고 이 영화에서 참 좋았다. 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4 에서는 이예춘이 삼백여편의 출연작 가운데 단 두 편 [나그네 설움]과 [푸른 하늘 은하수]에서만 악역을 맡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낙동강 칠백리] 도 포함시켜야 하니까 최소 세 편이다. 오프닝 크레딧 맨 앞부분이 사라졌고 아마 원래 크레딧은 김지미 - 김진규 - 최무룡 - 이예춘 순서인 거 같은데 이예춘 - 최무룡 - 김지미 - 김진규 순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얄팍한 악당 김비서나 다소 불만스러운 결말같이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지만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석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 것은 덕삼-삼용-채순 사이의 감정이 생생하고 애달프게 다가왔기 때문이고 그 중심에는 이예춘 배우가 있었다.
[2]
옥진이 딸을 잃을 때쯤해서 필름이 좀 유실된 것 같았기 때문에 심의대본을 봤다. 옆집 여자가 옥진 딸의 사고를 알리러 온 부분, 삼용이 서울에서 옥순 아버지와 마주쳐서 덕삼이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결국 구포로 내려가는 부분이 유실된 것 같다. 그리고 덕삼이 어린 삼용을 데리고 부모 찾아주러 부산 공장 갔다가 허탕치는 대목도 뒷 부분이 조금 유실된 것 같다.
물에 빠진 카메라 건지는 장면이 실제 영화에서는 애틋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시나리오 상에서는 의외로 밋밋했다. 채순이 귀향한 날 밤 삼용이 덕삼에게 부산 나가서 살자고 하는 장면도 시나리오보다 실제 영화가 더 좋았다.
채순이 찾으러 서울 가기 직전 삼용의 독백은 시나리오에는 없었고, 그 밖에는 영화와 거의 같은데 시나리오에만 있고 영화에서는 빠진 부분이 좀 있다.
- 초반에 덕삼이 면서기의 눈길을 피하는 대목 직전에 술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
- 채순과 삼용의 어린 시절 장면이 더 있다. 삼용이 학교에서 우등상을 타서 식구들 모두 즐거워하고 이웃들도 덕삼에게 좋은 사윗감 두었다고 부러워한다.
- 채순이 상경한 직후 윤호와 어머니가 전쟁 중에 잃어버린 동생/아들 용호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이건 원래 필름에는 들어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판본에서 유실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윤호/용호 형제의 어머니 역을 맡은 김정옥 배우가 63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204&r_serial=02
이걸 보면 원래는 "내가 어떻게 그말을 안하게 됐니? 난리통이라곤 하지만 네 동생 용호를 잊어버린게 일생의 한이고 가슴에 박힌 못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희 아버질 뵐 낯이 없다." 란 대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저 정도 대사는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 볼 수 있는 판본으로는 용호 부모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 서울 방직 공장으로 윤호를 찾아갔다가 허탕친 삼용이 생부와 아주 짧게 스치는 장면이 있다.
- 채순이 귀향한 뒤 윤호 부모의 대화가 조금 더 길게 나온다.
- 아기를 데리고 귀향한 채순과 마주쳤을 때 지문이 마음 아프다: "노하는 덕삼 체념하는 삼용"
[3]
1:07:10 경에 최무룡이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우리가 최무룡 + 담배 조합을 좋아해도 이건 좀 뜬금이 없었다. 저 시대 제작진 중에도 우리만큼이나 최무룡 + 담배 조합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인가. 심의대본에도 담배 피우는 걸로 되어 있긴 하다.
저 때는 많은 영화가 감초 조연으로 김희갑/구봉서/양훈/양석천을 투입했던 것 같고 이 영화도 그 중의 한편이다. 1:14:00 경에 하나마나 한 소리만 하는 점쟁이 김희갑과 최무룡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별로 필요한 장면은 아니지만 최무룡이 매우 예쁘게 나온다.
삼용이 가출한 채순을 쫓아가느라고 옥순 아버지 배를 낚아채는 장면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최무룡 특유의 민첩함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4]
현재 볼 수 있는 유일한 판본은 화질이 좋지 않고 그나마 영상도서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저 화질로라도 KMDb VOD로 집에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희가 다시 보고 싶어서 그래요….
사진 출처: https://www.koreafilm.or.kr/movie/PM_006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