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감독이 말하는 배우 최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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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21, 228호 (1999.11.30), 14-15 페이지
추모 기획 / 최무룡(崔戊龍 1928 ~ 1999)
그리움에 젖은 눈동자여, 안녕히
김수용/ 영화감독
내가 최무룡을 처음 본 것은 1948년 가을,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그 무렵 명동에 위치한 국립극장은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며, 중앙대학은 존 미리톤 싱의 [계곡의 그림자]를 참가작품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등장인물은 단 4사람. 깊은 산 계곡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노학자와 그의 부정한 젊은 아내, 그리고 양치는 목동과 길을 잃은 방랑자가 그들이다. 놀라지도 않고 차분하게 노학자의 넋두리를 듣는 방랑자가 바로 최무룡이었다. 그의 소리는 그리움에 가득 차 있었고 준수한 용모는 눈이 부셨다.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신선한 학생배우의 등장에 넋을 잃었다. 나도 그때 같은 또래의 사내에게 혼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얼마 동안 무대 위의 최무룡은 나의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해 봄이던가 중앙대학에서 [햄릿] 공연이 있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무대 앞자리에서 턱을 고이고 최무룡의 길고긴 그러나 유창하고 품위있는 셰익스피어 대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50년 한국전쟁이 터져 노도와 같은 전쟁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고 나는 살아남아 군복을 입고 후방도시 대구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극장골목길에서 연극을 마치고 나오는 한무더기의 배우를 만났는데, 그 틈에 최무룡을 발견하고 "아, 고마울시고 당신도 살아 있었구나!" 외치고 말았다. 나는 그후 그와 별로 교류가 없었는데도 친한 친구처럼 착각하고 살아갔다.
최무룡을 영화배우로서 내 카메라 앞에 처음 세운 것은 훨씬 뒤인 1964년 여름이다. 김영수의 희곡 [혈맥]을 영화로 만들게 됐을 때, 지성파 고학생을 찾다가 그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그는 연극에서 영화로 옮겨오면서 짧은 시간 내에 스타의 자리를 향해 달리고 있었으며, 김진규와 대등한 인기를 누렸고, 신영균과 더불어 남자 주역 트리오를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 [혈맥]은 나의 리얼리즘 계열의 첫 시도였는데, 최무룡이 많은 출연자 중에서 가장 빛난 것은 이때부터 개성있는 연기세계를 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기를 대별하면 움직임과 정지상태가 될 것이며 대체로 배우들은 큰 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그것은 연기의 내적 축적보다 외부 발산을 강조하기 때문에 심리적인 측면보다 형식적인 면이 강조될 때가 있다. 연기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완전히 조화를 이룰 때 성공할 수 있다. 최무룡과 함께 출연했던 당시의 배우 중 김승호 · 황정순 · 신영균 · 최남현 · 주선태 · 신성일 · 엄앵란은 형식면을 중요시했고 조미령 · 김지미 · 최무룡은 내적 연기에 충실했다. 물론 조용하고 침착하면서도 떠들썩한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몸 전체로 섬세한 감정표현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무룡의 연기에는 퍼스(호흡)가 적절하다. 대사를 줄줄이 외우지 않고 말과 말 사이에는 간격을 둔다. 요즘처럼 영화 전체가 뜀박질하다 끝나는 시대에는 좀 지루하게 느껴지겠지만 연기의 흐름은 반드시 속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적절한 사이가 절대로 필요하다. 최무룡은 40년 전에 벌써 연기 개안을 하고 감정의 흐름 속에 적절한 정지상태를 삽입해서 극의 진전에 긴장과 격조를 높이는 연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이것은 연극무대를 밟은 배우가 노력 끝에 스스로 도착한 결론이지만, 크게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 영상자료원을 찾아간 나를 최무룡은 이사장실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때마침 최민수의 영화가 크게 히트하고 있어 자연 우리의 화제가 그리로 옮겨졌다. "김 감독이 보기에 그 애 연기는 어때요?" "아직 멀었지." "칭찬해주고 싶지만 아버지 수준에 못 미쳤어요. 우선 젊은 배우치고 연기가 섬세하고 감정처리도 좋은 편인데 연기에 흐름만 있지 정지상태가 보이지 않아요. 즉 퍼스를 적절하게 구사한 아버지의 연기가 더 윗길이지요." 최무룡의 얼굴엔 우려와 안도가 동시에 퍼졌다. 최무룡이 민수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이다. 그때만 해도 해외전화의 감이 좋지 않아 소리소리 질러가며 딸을 셋 낳고 득남한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김 감독, 효실이가 아들을 낳았대잖아!" 우리는 "와!" 하고 환성을 질렀다. [혈맥]을 끝낸 후 한양영화사는 최초로 홍콩과의 합작영화 [화염산] (한국 상영 때는 [손오공]으로 제명이 바뀌었다)을 찍게 됐는데 제작부 간부가 진행비 5만달러를 가지고 증발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홍콩에서 국제 고아가 되고 말았다. 남자배우는 김희갑 · 양훈 · 최무룡, 여배우는 김지미 · 이빈화* · 양미희, 여기다 감독을 합쳐 7명인 우리 일행은 비싼 호텔에서 외상으로 묵으며 서울에서 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리의 우울한 한달이 지나고 어렵사리 현지 교민의 돈을 빌려 크랭크인을 하게 된 전날밤 최무룡네 아들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그날밤 우리는 외상술을 마셨지만 아들을 낳은 아버지는 기분이 너무 떠서 카바레의 무대에 뛰어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홍콩사람들은 최무룡의 노래에 정신을 잃었다. 브라보! 브라보! 샴페인이 수없이 터졌다. 내가 한국 배우를 소개하면서 최무룡의 득남 소식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윤정희에게 러브신 할 때 누가 제일 편안하게 해주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최무룡과 신성일을 꼽았다. "신성일씨는 자세를 맵시있게 유도해가며 여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게 배려해주고, 최 선생은 심리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뜨거운 감정으로 연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무룡은 그만큼 상대역의 연기를 이끌어내 연기에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영화평론가 호현찬씨는 "60년대부터 한국영화는 세 사람의 남자배우가 눈부신 활동으로 지탱해왔고, 신영균의 박진감 있는 분위기, 김진규의 포토제닉한 얼굴, 최무룡의 섬세하고 완벽한 연기가 특징이며 현재 여러 영상분야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들을 이 세 사람의 연기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인협회장이 있던 날 아침, 비좁은 장소에 검은 옷의 영화인들이 발디딜 틈이 없었고 투명하고 그리움에 젖은 눈동자의 최무룡 영정에는 문화훈장이 번쩍이고 있었다. 최무룡은 운명하기 며칠 전까지 시골 무대를 돌아다녔다. 비록 그것이 옛날처럼 갈채를 받던 영광스런 품은 아니었어도, 무슨 상관이랴. 그는 끝까지 자기 힘으로 무대와 생활을 책임지고 살다가 떠난 사람이다.
* 이빈화 배우는 [화염산]에 출연하지 않았다. 조미령 배우를 잠시 혼동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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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기관지 아카이브 프리즘 #4 (2021.03.20), 260 페이지
... 최무룡 씨만큼 감정 처리가 정확하고, 그이는 참 연기의 산신령이에요. 그런 분이었어요. 난, 이 최무룡 씨가 아쉬워요. 굉장히 연기 잘하는 사람이에요.